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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 중 한 명입니다. 을사오적과 더불어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인물이죠. 1905년 일본과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체결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박제순 등과 함께 조약체결에 찬성하였고,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 역시 한국 측 전권위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조인하였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귀족원 회원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를 하였고, 태평양 전쟁시기인 1943년 11월 1일 총독부가 조선인에게 작위를 수여하기 위해 개최한 회의에서 자작 직위를 받았습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재판 도중 사망했습니다.
- 이완용이란 인물은
- 왜 하필 을사조약이였나
- 독립협회
- 이완용 죽음
-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일파를 싫어하는 이유
이완용이란 인물은
1910년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서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을 체결하였으며, 경술국치 직후 백작작위를 받고 1920년엔 후작으로 승작되었습니다. 또한 친일단체 일진회 총재로서 전국순회강연을 하며 합병을 적극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이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왜 하필 을사조약이였나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는데요. 이 조약 체결 이후 고종황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이때 고종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국운 앞에서는 소용없었죠. 그리고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림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명의 특사를 파견했는데요. 이를 빌미로 일본군이 덕수궁에 난입해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는 순종 황제를 즉위시킵니다. 이로 인해 한일 신협약(정미 7 조약)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사실상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독립협회
1896년 서재필 박사 주도로 만들어진 단체로 자주민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목표로 활동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중 계몽 운동 및 민중계몽활동을 펼쳤습니다. 1898년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고 정부와의 대립 끝에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다시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전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완용 죽음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건강악화로 인해 보석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곧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친일파를 싫어하는 이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는 식민지였습니다.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모든 것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셨고, 그분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며 조국을 배신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매국노들입니다. 국가란 국민 개개인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것이고, 개인의 안위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건데,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큰 비판을 받는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죠. 많은 분들이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알지만 정확한 친일행위까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기회에 우리 모두 공부해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 지키신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편한 세상을 만들어주신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