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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관 유묵 어머니 유언 정리

★※●★◎※●〓§▒ㅁ〓§▒◈◎ 2023. 4. 1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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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서 1902년 9월 21일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으며, 그의 희생은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안중근의사 독립운동활동
안중근의사 희생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물
안중근의사 유묵
안중근의사 아버지
안중근의사 어머니
안중근의사 유언

 

안중근의사 독립운동활동

안중근의사는 1919년 3.1일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전 의사로서도 활동했는데, 그의 활동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하기도 하고, 민족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의사 희생

안중근의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그는 1909년 러시아에서 조선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10년 조선 독립당을 창당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1923년 4월 29일 도쿄에서 일제총독부 국무부장인 스즈키 요시히로를 암살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사형당하였으며, 그의 희생은 우리나라 독립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념관은 안양천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있어,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며 기념관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위치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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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물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사상, 암살당한 당시의 상황등을 알아볼 수 있는 전시물들이 있습니다. 또한, 안중근의사가 활동하셨던 조선의 역사적 배경과 일제강점기 역사적 배경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의사의 생가와 동일한 모습을 재현한 전기관도 있어, 안중근의사의 삶과 업적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 유묵

유묵은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작품성이 높은 예술품이죠. 하지만 최근에는 안창호 선생의 유묵처럼 기념관 등에 기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역사적 가치가 높고 소장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이후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남긴 글들이 유명한데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글이 있죠.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입니다. 또 유명한 유묵으로는 '경천'이라는 글귀라고 합니다.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입니다. 이외에도 '견리사의 견위수명'(이익을 보거든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와 '청초당' (맑은 풀빛 같은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 사는 집) 등 다양한 유묵이 있다고 합니다. 

 

안중근의사 아버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는 안태훈(1858~1931) 입니다. 조선 말기 무관학교 출신으로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습니다.  1907년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최재형 선생과 결탁하여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였고, 대한독립군 사령관으로서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망명하여 교육사업 및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민족주의자로서 활동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안태훈에게 시집와서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바로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결혼 후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지만, 자식교육만큼은 남달랐습니다. 특히나 안중근 의사에게는 엄격하게 훈육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지만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를 위해 직접 서당을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글공부보다는 무술연마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리저 안중근 의사는 '제가 비록 미천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를 들은 조마리아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강인한 정신력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훌륭한 어머니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언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는 우리 민족의 생명과 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라는 말과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요.'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요.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