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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업적 /출생과 죽음 /명언 /아들

★※●★◎※●〓§▒ㅁ〓§▒◈◎ 2023. 4. 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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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분인 김좌진 장군입니다.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켜낸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여 주고 지켜준 영웅 중 한 분이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역사 속 위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김좌진 장군에게 후손으로서 감사함을 느끼고 본받아야겠죠? 이번 시간에는 김좌진 장군에 대해 알아보고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좌진 장군 아들 김두한

목차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기념관 위치 요금 바로가기
김좌진 장군 업적 요약
김좌진 장군 출생과 죽음
김좌진 장군 명언
김좌진 장군 아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기념관 위치 요금 바로가기

 

김좌진 장군 업적 요약

청산리대첩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진행된 전투입니다. 1920년 10월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 19사단과 20사단 예하병력 5천여 명을 사살한 큰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만주의 한국 독립군 토벌작전을 중지하게 됩니다. 청산리 전투 당시 상황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은 대대적인 보복전을 준비했는데요. 특히 간도지방 한인사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동포들이 희생되었는데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청산리 전투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백운평 골짜기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고, 어랑촌 마을에서는 안무장군이 이끄는 국민회군이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어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세 번째 공격을 감행했죠. 결과는 무려 5천여 명의 일본군이 사살되는 대승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북로군정서는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연합부대였습니다. 총사령관은 김좌진 장군이었고 부관은 이범석 장군이었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이라는 명칭 아래 만주지역 여러 독립군 단체 및 중국 관내의 한국독립군 등 약 2천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유시 참변(1921) 이후 러시아 연해주일대의 무장세력 통합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부라는 군사조직으로 개편됩니다. 

 

 

김좌진 장군 출생과 죽음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후 국권회복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1910년 10월 21일 ~ 26일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큰 공을 세우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투 후 다음 해인 1921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게 되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김좌진 장군 명언

김좌진 장군의 대표적인 명언은 '나는 군인이다. 나의 무기는 총이다. 그러나 나의 적은 총이아니다. 나의 적은 부당함이다.'

입니다. 이 명언은 김좌진 장군이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낸 말입니다. 김좌진 장군은 무력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당함과 불의를 막기 위해 싸우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다른 명언은 '먼저 핀 꽃은 먼저 진다. 하지만 그 꽃잎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입니다.

 

김좌진 장군 아들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김두한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 아들로도 유명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주먹왕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18년에 태어나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처럼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1930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우미관극장 지배인 생활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한 조선인을 보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협객이란 별명을 얻으며 여러 싸움판에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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