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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 말기 비운의 왕비인 명성황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는 16세 때 고종의 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혀나갔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했고, 사후 국장 절차 없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현재 명성황후 생가터에는 매년 10월 8일 추모제향이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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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어떤 사람인가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업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명성황후는 어떤 사람인가
명성황후는 어릴 적 이름은 민자영입니다. 민 씨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행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게다가남편인 고종 역시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나라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손을 잡았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결국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전 일제 측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에 위치한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년)에 건립되었는데, 처음에는 '감고당'이라 불렸습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졌는데, 나중에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1966년 중수하였고, 1970년 안채를 수리하면서 행랑채. 사랑채. 별당 등을 복원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ㄱ'자형 안채와 'ㅡ' 자형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 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별당채는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또한 재실. 연못 정자 등이 있고, 뒤편 언덕에서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기념관은 명성황후 생가와 같이 조성되어 있으며,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에 위치한 명성황후 기념관은 2002년에 개관하였으며,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되어있습니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 ~ 제4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전시실마다 주제별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4 전시실에는 명성황후 관련 영상물을 사영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명성황후 업적
명성황후가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의 배경에는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안동 김 씨 세력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고종이 왕이 되면서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펼쳤던 대원군과는 달리 명성황후는 개방 정책을 추진했고, 이로 인해 개화파 인사들을 등용하게 되죠.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1873년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대원군이 물러나게 되고 민 씨 일족이 다시 집권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친청-친미 노선을 걷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청나라나 미국 등 열강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패배 후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약체화되어가고 있었고 영국 또한 인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반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정책을 펼치고 있었죠. 이러한 국제 정세를 이용해서 한반도 진출을 꾀하고자 했던 게 바로 명성 황후였습니다. 특히 삼국간섭 사건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때 운산광산 채굴권 획득,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확보, 압록강 유역 및 울릉도 삼림 채벌권 요구 등 경제적 이권을 챙겼으며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 파견 요청등 정치적 간섭까지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명성황후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바로 임오군란이죠. 구식 군대 군인이었던 신식군대와의 차별대우로 인해 일어난 난이었는데요. 처음에는 별 다른 피해 없이 진압되는 듯했으나 곧이어 궁궐 습격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궁지에 몰린 명성황후는 충주로 피신했다가 청나라 군병요청으로 들어온 위안스카이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신정변마저 일어나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죠. 내막을 살펴보면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모두 승리하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 우익세력들이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에까지 실리면서 역사왜곡을 세대를 이어서 교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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